<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고,>
2021. 11.09 - 11.17
여튼952
의정부는 '시민을 기억하는 도시, 미래를 준비하는 시민'이라는 슬로건을 갖고 문화도시를 준비하고 있다. 의정부가 표방하는 ' 기억'이 갖는 함의는 과거에 머무른 명사형 Memory가 아닌 기억하는 행위 속에 내포된 관계에 대한 존중이다. 이는 분단 이후 시기부터 의정부의 지역 정체성으로 계속해서 언급되는 주한미군기지, 기지촌 등과 같은 과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1 과거 를 지금의 문제영역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시민이 주체가 되어 지금의 의정부를 구성하고 미래의 방향과 길을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문화도시 의정부는 청년 시각예술인들의 실천을 존중하고 신뢰해주었고, 오랫동안 비었던 주택이 전 시공간 ‘여튼952’로 몸바꿈을 하여 시민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여튼952는 의정부 가능동에 있는 전시공간으로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던 빈집이었다. 이 공간의 장소성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캠프 라과디아와 캠프 레드 클라우드 주변의 기지촌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2 그러나 여튼952 공동운영단은 공간을 가꾸면서 역사학자처럼 일부러 애써서 과거에 대해 인식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공간에서 묻어나는 기억들에 주목했다. 공간 내부의 문틀과 바닥에 쌓인 먼지 그리고 벽의 곰팡이를 통해서 방치되었던 시간을 상상했으며, 방마다 다른 손잡이와 조명을 통해서 집을 채웠을 온기를 짐작했다. 빈집을 둘러싼 풍경은 더욱이 생경하다.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폐가는 짐이 가득 적재된 창고로, 들풀과 넝쿨로 뒤덮인 길고양이의 안식처로 기능하며 본래 집의 기능을 잃은지 오래였다. 이처럼 공간 내외부를 조금만 둘러보면 알 수 있듯이 여러 번 덧발라서 질기게 벗겨지지 않았던 여튼952의 벽지와 같은 다층적인 기억이 존재했으며 머무르지 않고 생동했다.
이처럼 기억은 동적이고 이에 대한 반응도 움직이는 생동성을 갖는다. 특히 앞서서 경계했던 바와 같이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작용할 때에 기억은 모든 상황에서 똑같이 적용되는 고정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다른 내용과 다른감성으로 기억될 수 있고, 기억을 불러내는 때에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작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3 기억을 현재로 불러와 재구성하고자 하는 이러한 주체의 실천은 필연적으로 창조성을 만들어낸다. 특히 기억에 대한 예술적 실천은 기억의 위기를 주제로 삼고 그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창안한다. 이를 통해 기억과 망각의 역동성이 생생한 모습을 띠게 된다.
전시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고,》는 기억이 창조적 능력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창조적 예술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생동성에 주목하고, 각기 다른 조형 언어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김윤하, 오윤, 장윤지의 작품을 통하여 여튼 952를 기억의 움직임이 생동하는 공유의 장으로 만든다.
김윤하는 일상에서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낯선 감각과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억을 붙들어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업을 해 왔다. 작가는 리서치를 통해 생산된 결과물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매체에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고 여러 매체를 활용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O.Documentary>(2021)는 작가의 눈에 우연히 포착된 주황색 쓰레기봉투로부터 시작된 작업이다. 김윤하는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웠던 주황색을 본 이후부터 주황빛을 따라 시간을 기록했다. 주황색 쓰레기봉투를 포착한 작은 시선에서 시작했지만, 기록하는 반경이 넓어지면서 철거를 위해 주황색 천막으로 싸인 건물, 이와 반대로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위해 역시 주황색 천막으로 싸인 철골 구조 등과 같은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딛게 된다. 이처럼 발견하고 관찰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김윤하 자신의 시선이 머무는 시간과 공간을 기록한 것은 <그때의 조각들>(2016), <주황빛을 따라>(2021), <돌고 도는 그 사 이>(2021) 총 3개의 부제로 사진, 영상 등에 담겨 전시공간에 다시 재조직된다. 작가의 기억의 편린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주황빛 순환계는 관람객의 눈과 기억 속에서 생동하며 새로운 주황빛 순환계를 만들어 낸다.
오윤은 비정형화된 풍경에서 낯선 이미지의 흔적들을 수집하여 이에 대한 단상을 회화로 재연출하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는 얇은 종이에 여러 차례 색을 덧칠하며 작업의 대상인 물체가 갖거나 풍경이 축적한 시간을 단단히 응축시킨다. 인위적인 피조물에 대한 단상들을 토대로 작업을 이끌어 오고 있는 오윤은 불안한 수직적 구조의 장면과 쓸모에 의해 버려져 죽어가는 등의 연출을 가감 없이 활용한다. 이러한 연출은 일종의 연극 무대의 독백으로 작동하여 관람객에게로 옮겨가 대화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 오윤은 여튼952가 거주 공간으로 기능하던 때의 기억을 소환하고 공간을 통해서 재사유한 작가 자신의 개인적 기억과 감정을 되짚는다. 선반에 정성스럽게 올려둔 <수집품> 시리즈(2020-2021)와 집안 곳곳에 놓인 <죽음의 사랑>(2020), <Chee se Rush>(2020) 등과 같은 작품은 정상적인 형태를 갖춘 가구 하나 없이 몇 년 동안 비었던 공간을 누군가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거처로 기능하던 시간에 대한 공간의 기억으로 채운다. 공간 밖의 풍경을 창의 전면에 담아내는 베란다와 작은방은 이미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풍경을 바라보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선사하는 빛>(2021), <우리, 무너지지 맙시다>(2020)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숨이 멎은 새, 가라앉은 방수포 등 죽은 풍경을 담아낸 탓일까, 미처 묵은 때가 벗겨지지 않은 공간 때문일까. 오윤이 작가 노트에서 언급한 '사라지는 풍경에서 들려오는 조악한 블루스'가 내면에 밀어두었던 쓸쓸함을 불러낸다.
장윤지는 일상 속에서 발견한 우연한 시선과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으면 후회할 듯한 특별한 장면들을 포착하여 표현해왔다. 작가는 이전에 수집한 사진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발견된 사진을 보면서 떠올린 촬영 당시 작가 자신의 상황, 감정, 계절 그리고 순간의 냄새 등을 화면에 드러낸다. 기록한 순간들의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 속에서 생동하며 작가 자신을 활발히 자극한다. 장윤지는 이러한 기억의 흐름을 울렁이는 듯한 양감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여튼952가 위치한 의정부 가능동과 같이 아파트가 적은 주택가가 즐비한 동네를 거닐다 목격을 할 만한 장면 혹은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봐왔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을 불러온다. 단풍이 제법 들은 나무가 보이는 방에 놓인 <강아지 와 버려진 프린트 기계>(2020), <매우 맑은 표면>(2021), <주황둘레>(2021)는 쓰임새를 잃고 버려진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색채가 선명하고 주변의 들풀들이 마치 이를 감싸는 듯 보인다. 이는 사진을 다시 충실하게 재현한 작업이지만 시선의 주체인 작가의 감정을 다시금 투영하여 재구성하기에 장면을 포착한 순간의 기억이 화면 위에 생동한다. 여튼952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고양이 삼총사>(2021), <고양이는 맑음>(2021) 등 집안 곳곳에 시선의 위치를 다르게 하여 분명히 보이게 배치하거나 공간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발견하도록 숨겨놓은 작업은 작가가 길을 거닐며 발견한 뜬금없는 존재들에서 느꼈던 감정과 장면 너머로 했던 상상의 즐거움을 전달한다.